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 사후, ἐν Χριστῷ, 그리고 광야의 존재론
성경은 사후 세계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혹은 어디를 천국이라 부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적 선입견이나 개인적인 체험을 철저히 배제하고 성경을 맥과 결에 따라 차분히 읽어나가야 하는데 이런 노력을 기울여본 사람은 알겠지만 성경에서 사후 세계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혹시 성경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하는가? 그건 아니다.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 분명 존재한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분명한 서술과 그 존재를 묘사하는 것에 대한 절제, 이 간극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인가?
I. 성경의 절제 — 구조가 아니라 상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그래서 그 땅에서 그 씨(백성)들이 그 뜻(언약)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천국의 삶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땅에서 장수하며 부유해지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증거라 확신했다. 이런 세계관 탓에 바벨론에 의해 그들이 믿던 하나님의 나라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그 땅과 그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관심의 대부분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후와 관련하여 스올(שְׁאוֹ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의인과 악인의 사후상태에 대한 구획이 나뉘어져 있지 않는 등 구체성이 결여됐음을 볼 때, 공간으로서의 사후 세계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불가지 “영역”에 대한 절충적 개념 정립을 시도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포로기에는 다니엘에 의해 부활로 여겨지는(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단12:2a) 개념이 소개되지만 역시 사후세계의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따라서 구약은 그 땅에서 그 씨들이 어떻게 언약을 유지하며 사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사후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한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ἀνάστασις(부활), ζωὴ αἰώνιος(영원한 생명), παράδεισος(낙원), 새 하늘과 새 땅. 등과 같은 사후와 관련된 개념들이 명시적으로 소개되어 전파되지만 구약과 마찬가지로 개념을 넘어 구조 설명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중하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아담적 인간의 악한 호기심은 이 금기를 깨버렸다. 성경은 최대한 절제를 하건만 인간들은 묵시적 상징들을 가지고 와 해석을 빙자한 사설(邪說 )을 쏟아냈다. 이들에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수모를 겪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굶주린 호기심의 배를 채워주는 식재료가 아니라 묵시적 상징들을 사용해 우리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도 사후 세계의 묘사에는 강한 절제력을 보이셨다. 대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아브라함의 품.”, “바깥 어두운 데.”등의 표현들을 통해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각각의 상태들이 사후세계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것을 설명하고 계신다.
신약은 사후세계로서의 천국을 임재(παρουσία)와 연합(ἐν Χριστῷ)의 완성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의 얼굴을 볼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으니.” 등등의 표현들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 천국은 공간 정보가 아니라 관계 기반의 상태라는 것이다.
II. 천국을 보상 체계로 만드는 위험
안타깝게도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상태를 포괄하는 천국을 감각적 보상의 극대화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상징을 실재에 대한 묘사로 오독한다. 이런 류의 간증들이 범람해 있는 시대다. 단테의『신곡』이 문화적으로 지옥의 형상을 고정시켜 버린 것처럼, 이런 간증들이 천국을 물질계에 종속된 형상으로 고정시켰다. 그 결과 천국은 저급한 감각적 보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후로서의 천국을 감각적 과잉의 결정체가 아닌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천국을 보상 체계로 인식하면 어떤 오류가 발생할까? 복음이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한다. 내가 만족하는 환경, 내가 중심이 되는 공간, 내가 누리게 되는 보상. 이것은 확장된 자아 숭배에 다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상급이라고 말씀하셨다.
III. 지옥 — 존재론적 죽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곡의 영향으로 지옥 역시 오해되고 있다. 천국이 확장된 자아숭배를 기반으로 하는 보상체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면 지옥은 자아숭배를 기반으로 살아왔던 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의 다른 표현은 존재론적인 죽음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성경의 선언때문이다. 따라서 지옥은 1차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 상태로 이해돼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 종말론적 심판을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지옥의 형태와 관련한 직접적인 설명을 들을 수 없기에 형태에 관한 속단은 유보함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해질 때까지는 종말론적 심판 역시 존재론적 죽음 상태의 영구적 확정으로 이해하여 자아숭배가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얼마나 큰 파국을 불러오는가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이 오히려 복음에 부합하는 자세일 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현세의 삶이 내세에, 종말에 확정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천국이 ἐν Χριστῷ라면 지옥은 당연히 그 바깥 영역 어딘가이다.
IV. 육의 부활은 왜 필요한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하나 생긴다. 사후 세계로의 천국이 전적으로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왜 육의 부활(ἀνάστασις)을 약속하셨는가?
여기서 창조론과 종말론이 조우한다. 전통적인 해석은 창세기의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를 타락 이전 창조상태에 국한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선함(טוֹב)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목적론적 선함으로 본다면, 창조는 처음부터 완성을 향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골로새서 1장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선언이 이를 뒷받침 한다. 몸의 부활은창조적 관점에서 필연성을 가진다. 새 창조의 영역에 속하는 몸의 부활은 복구가 아니라 완성(consummatio)이다.
우리가 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다시 산 몸인 부활체는 육(σῶμα)이지만 바울이 탄식한 사망의 육이 아니라 확신에 차서 역설한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이며 비물질적이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기 때문에 죄의 소욕과 정욕의 도구가 아니라 예배의 도구인 것이다.
육의 부활은 구원의 여정에서 주어지는 보상체계가 아니라 창조의 완성이자 구원의 마침이다. 신자의 사후세계는 육과 세상으로부터 영혼이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창조 질서 완성을 지향한다
V. 새 창조 — 폐기인가 완성인가
마찬가지로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옛 질서의 개선이나 진보일 수 없다. 하지만 이종(異種)으로의 전환을 위한 전면 폐기 또한 아니다. 연속성은 있으되 질적으로 단절된 변혁이다. 씨앗이 심기면 다른 형체로 자라듯, 동일한 본질이지만 다른 질서로 존재한다. 그래서 새 창조는 ἐν Χριστῷ의 우주적 확장이다. 중심은 관계이고, 질서는 그 관계의 반영이다. 에베소서 1장의 선언대로 만유가 그 안에서 통일된다.
천국은 공간의 긍정적 진보가 아니라 언약의 완전한 성취이다.
VI. 본질 동일성 — 강도의 차이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ἐν Χριστῷ와 종말의 ἐν Χριστῷ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아직은 경륜적 제약 속에 있다. 사망의 몸을 입고 있고, 죄의 잔존인 옛사람이 살아 있어 믿음의 눈으로 보는데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때는 가림막이 제거될 것이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 종말의 천국은 역사적 진공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새로운 관계 창출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연합의 제약 제거다. 믿음이 실상과 증거로 전환되는 순간이며 연합의 농도가 무한히 상승하는 순간이다.
VII. 광야는 천국이다 — 존재의 비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이 천국을 어떻게 누리고 살아야 할까? 이스라엘의 광야 경함에서 통찰을 얻어 보도록 하자.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가던 1세대들은 비록 자유가 없는 노예였지만 육의 관점에서 애굽이 광야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애굽을 광야의 비교대상으로 놓고 광야를 결핍과 고난의 장소로 규정했다. 만나 외에는 먹을 것도 마땅찮고, 물도 부족했으며, 여정도 마뜩찮았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애굽의 기억을 소환하며 불평, 불만을 토로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는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그들에겐 광야가 우주였다. 그래서 1세대가 느끼는 결핍이 딱히 와닿지 않는다. 1세대에게 결핍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결핍이 아니라 질서였다. 광야가 “기준 세계”였던 것이다. 구름기둥이 멈추면 멈추고, 움직이면 움직인다. 시간 계산도 경로 설계도 필요없다. 전략도 무쓸모다. 동행이 궁극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지만, 이 여행의 본질은 목적지가 아니라 임재와 동행이었다.
바울의 언어로 옮기자면,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가 우주인 2세대가 새사람이다. 그리고 죽어가면서도 애굽을 그리워하던 1세대기 옛사람이다. 이 두 세대가 “사망의 몸”(σῶμα τοῦ θανάτου)이라 일컫는 몸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연합의 경륜적 한계다. 어떻게 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요한복음은 예수와 니고데모의 한밤중 대화를 통해 위로부터(ἄνωθεν)나야만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처럼 동행에 의미를 두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광야에서 태어난 자인가? 위로부터(ἄνωθεν) 난 자는 비교 구조가 해체된다. 애굽이 더 이상 삶의 기준이 아니게 된다. 이 때부터 광야는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이 된다.
신가가 겪게 되는 이 광야의 구조는 계시록의 설명과 겹친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자. 아들을 낳은 여인이 광야로 도망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 보호를 받는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보호의 장소다. 사탄의 추격이 있으나, 하나님의 예비하심 또한 있다. 이견이 없는 해석대로 그 여인을 교회로 본다면, 교회는 도성 안이 아니라 광야에서 보호받는 존재다. 그래서 광야는 역설적이다. 임재가 있으나 탄식이 있다. 보호가 있으나 시험이 있다. 눈물이 있으나 동행이 있다. 유혹이 있으나 속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한다. 이것이 신자와 신자의 무리인 교회가 누리는 이 땅의 천국이다.
그렇다고 광야가 안식의 완성인가? 아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듯,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이 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리, 보호 아래 있는 자리,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자리인 광야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자가 과연 종말론적 안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
